[전시리뷰_2021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크로스로드, 어떤 도시에 살 것인가>] HOW > WHERE > WHAT
공간이 주는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공간은 정체성이다. 건축가이자 철학가이며 화가였던 르 코르뷔지에는 이렇게 말했다. 삶 자체가 하나의 건축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고 만다. 전해지는 것은 사유뿐이다. 건축가는 시대의 생각을 남기는 사람이다.
CROSSROADS, Building the resilient city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세운상가 일대에서 열리는 2021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는 '크로스로드, 어떤 도시에서 살 것인가'에 대한 주제로 여러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주제전과 도시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글로벌 스튜디오, 게스트시티전, 서울전, 현장프로젝트가 진행된다. 2021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의 총감독은 프랑스의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이며, 그는 이번 주제전과 도시전의 큐레이팅을 도맡았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사람과 공간의 매개체인 '삶'을 '건축'으로써 풀어내며, 결국 어떻게(HOW)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닌, 어디에서(WHERE) 살 것인가, 즉 어떤(WHAT) 곳에서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고민하게끔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이들의 대답은 지속 가능한 도시(Resilient city)이다.
주제전
2021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의 주제전은 '건축 X 인프라'라는 부제를 가지고 건축과 공학기술의 접목에 대해 고민한다. 인프라가 도시의 지속가능성(회복력)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건축이라는 행위가 도시에 적합한 인프라의 형태로 전환될 수 있을지, 건축은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등에 대해 질문하기도 한다. 이는 지금까지 분리되어 온 건축과 공학기술의 융합을 모색하며 도시의 회복력, 지속가능성, 심미성에 대해 새롭게 도전함이다.
주제전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작업물은 아래의 Circa Diem(시르카 디엠)이다.
상황의 한계로 작업물이 실제로 구현되지는 못했지만, 어떤 의도를 가진 작업물인지 천막 속의 영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해볼 수 있다.
사람이 생활을 함에 있어서 큰 영역을 차지하는 것은 '빛'이라고 생각한다. 일조권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시르카 디엠은 빛으로 형성된 패턴을 통해 하루 동안의 태양의 흐름을 묘사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필요한 양의 빛을 적시에 느끼게끔 한다. 그로써 '빛'이 결핍되지 않은 하루를 완성한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는, 어떻게 보면 사람이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인 자연의 영역에 공학기술을 이용하여 제어하고자 도전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지속 가능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하는 부분은 인간이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자연의 영역이 아닐까. 어떤 도시에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지속 가능한 도시라면, 이때 '지속 가능한(resilient)'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한 답을 내릴 필요가 있다.
도시전
도시전은 소주제 별로 진행되며, 지속 가능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공간인 도시와 도시에서 건축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탐구한다. 도시와 자연,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 지상과 지하,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연결고리를 강화함으로써 도시의 새로운 미래를 상상해본다.
지상/지하(ABOVE/BELOW)
유산/현대(HERITAGE/MODERN)
공예/디지털(CRAFT/DIGITAL)
자연/인공(NATURAL/ARTIFICIAL)
안전/위험(SAFE/RISK)
개인적으로 도시전은 주제전에 비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2021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전문적이고 깊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만큼, 이를 접하는 관객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도 불가피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 비엔날레가 주제를 풀어내는 서사에 대해서 만족한다. 관객 동선의 시작을 주제전으로 하며 한국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은 2021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지닌 주제와 그를 논하는 방법을 보다 다양하게 나타냈고, 도시전으로 이어지며 다섯 가지 소주제를 통해 관객과 더욱 상호작용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주제전이 비엔날레를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서 사실 100퍼센트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전문적 지식을 갖추지 않은 채로 받아들이기에는 작품들이 품고 있는 의미들이 어렵기도 했고, 작품들의 설명을 읽고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작품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내용을 받아들이고, 어떤 내용은 넘길지에 대해서 결정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며, 이 또한 전시의 의도라 생각한다.
회귀(回歸)
HOW > WHERE > WHAT
어떻게가 아닌, 어디에서 살 것인가에 대해 답하고, 그것은 어떤 어디(도시)인지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정의가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르 코르뷔지에의 말을 빌리자면, 건축가는 시대의 생각을 남기는 사람이다. 2021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서는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RESILIENCE"라 답한다. 회복력 있는 도시. 그럼 여기서 우리는 어떤 도시가 과연 회복력이 있는 도시인지에 대해 한 번 더 고민해 보아야 한다.
크로스로드 전시에서는 회복력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분석한다. 이제 우리의 몫이다.
회복력 있는 도시, 내가 생각하는 RESILIENCE란?
내가 생각하는 회복력을 갖춘 도시는, 상생하는 공간으로서의 도시이다. 사람은 공간 속에서 생활하고, 이를 연결하는 매개체는 건축이다. 상생하는 공간으로서의 도시란, 이번 비엔날레 도시전에서 다루고 있는 FIVE CROSSROADS, 지상과 지하/유산과 현대/공예와 디지털/자연과 인공/안전과 위험이 상생하는 공간이라 여긴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Head in the Clouds(구름 속의 세계)이다.
궁극적으로 도시가 추구해 나가야 하는 방향은 자연으로의 회귀라고 생각한다. 니체의 영원회귀와 같이, 모든 것은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뿌리로 돌아가야 함이다.
回, 돌아올 (회)
그대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우선 그대들에 의해 창조되어야 한다. 그 세계는 그대들의 이성, 그대들의 심상, 그대들의 사랑 안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대들 인식하는 자들이여, 그러면 그대들은 그대들의 행복에 도달하게 되리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회복력 있는 도시'는 자연으로의 완전한 회귀이기보다는 조화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겠다.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이 의미를 '융합'이라는 단어로 풀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위의 Head in the Clouds(구름 속의 세계)가 이를 가장 잘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신이 만든 건축이며, 인간의 건축은 그것을 배워야 한다.
안토니오 가우디
모든 건축물을 자연적으로 설계한 위대한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는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그의 자연주의 건축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구엘공원과 같은 곳들이 그의 건축, 즉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매력적인 공간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그 건축이 만들어 낸 공간 속에 삶이 담겨있고, 시대가 담겨 있으며, 정체성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의 몫이다. 어떤 도시에서 살 것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Resilience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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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_WESS <레몬은 파란색 그림자를 갖고>] 경계들의 맞물림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그 시간의 경계 속에 살고 싶다. 그 경계의 시간 속에서는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고, 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얻는 그런 기분이다.
아무것도 위임되지 않은 시간
이번 WESS 전시 <레몬은 파란색 그림자를 갖고>의 큐레이터 김선옥은 정확하게 낮도 밤도 아닌, 해가 질 때쯤 애매모호한 시간을 일컫는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을 전시의 주제로 삼는다. 그리고 이 시간을 '아무것도 위임되지 않은 시간'이라 일컫는다. 13세기 고대 로마부터 쓰였던 관용어인 개와 늑대의 시간은 빛과 어둠이 겹쳐 생긴 어스름한 실루엣의 그림자 때문에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이 안 되는 기존의 시공간이 전복되는 경계를 설명한다. <레몬은 파란색 그림자를 갖고>는 전시에서 사물들의 기존 질서가 어긋나는 균열의 순간에, 역설적으로 의미가 다시 생산되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순적 시간 속 다의적 존재
김보민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수동적으로 경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됨이다. 모든 사물은 전시장에 위치하는 순간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로 작동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가장 가시화하여 나타낸 작품들은 바로 아래와 같다. 기획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작품의 목격자들은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사물을 해석하고, 더 나아가 이것의 의미화를 위한 각자의 방식을 시도한다. 사물과 거리를 좁히고 눈을 마주치며, 시선을 통해 사물을 더듬고 감각하기를 시작한다. 이 과정으로부터 지각된 경험에서 비로소 우리는 사물을 이해하고, 의미를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변신>(2020)은 <그림자>(2016)의 연작으로, <그림자>와는 달리 입체적인 서사를 드러낸다. <그림자>는 분할된 경계 속 사물들이 자신의 그림자로 다른 사물이 되거나 다음 장면으로 연결되며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같은 시잔에 공존하는 데에 반해, <변신>은 시차를 두고 배경이 달라지고, 서사가 더해지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김보민은 <변신>에서 개화산 약산사의 동굴 설화를 모티프로 북촌의 골목 풍경을 그려 넣으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 실존하는 장소를 한 화면에 담아내며 누적된 시간을 드러낸다. 이는 풍경화의 기록적 속성을 거부함과 동시에 작가의 적극적 개입으로 재구성된 설화가 액자 구조처럼 다양한 이야기가 중첩되는 입체적인 서사가 되었다.
<포옹>에서의 연쇄적 움직임은 비단 위에 먹과 호분의 질감으로 입체적 몸짓이 되며, 이는 빛에 의해 생기는 프레임 밖의 그림자로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게끔 새로운 공간을 제공한다.
작가는 전통회화만의 정형화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이는 전통과의 단절이 아니라 서구화된 양식 속 시간의 횡축을 자유롭게 조절하여 전통의 시간성을 재정립하고, 현재에서 과거를 감각하도록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보민의 그림은 동양/서양, 전통/현대, 자연/도시, 꿈/현실, 허구/실재 등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거나 단절할 수 없는 조화로운 세계를 드러낸다.
장보윤의 <블랙 베일>은 개인이 기억하는 파독 간호사의 삶을 다룬다. 이번 영상 작업 역시 장보윤이 영상 작업에서 자주 사용하는 '실제 당사자가 아닌 낯선 타인의 입을 빌려 전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관습적으로 대상을 지각하는 시간을 유예시킨다.
이 작업물은 독일 출신 배우의 신체를 통해 드라마틱하게 한국 여성의 편지를 낭독하면서, 대상의 리얼리티를 증언한다. 이는 기존의 관성적인 다큐멘터리 속성을 거부함이다. 나아가 <블랙 베일>의 독백에서 비연속적으로 뒤섞인 문장들은 개연성을 벗어나 기존의 서사를 재구성한다. 결국 재현된 이미지를 통해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사이에서 휘발된 실제 이야기는 작가가 선택하고 편집한 몽타주로 재구성되고, 이로써 기록은 비로소 운동성을 획득함이다.
파독 간호사의 삶과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소설 <목사의 검은 베일>(1936)이 녹아 있는 장보윤의 <블랙 베일>은 작가가 개인의 삶을 추적하여 떠나는 여정으로, 절대 과장하거나 정도가 지나친 법이 없다. 그곳에는 환락은 없지만 낯설게 보이는 익숙한 풍경이 있다.
경계들의 맞물림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경계들의 맞물림 그 자체이다. 이를 가장 단편적으로 잘 보여주는 장면은 낮과 밤의 시간의 경계 속 불완전한 개개인, 흘러나오는 Miles Davis의 Generique에 맞추어 춤을 추는 해미가 담긴 씬이라 생각한다. 씬에 담긴 모든 것들이 경계에 서있었고, 불완전했다. 그럼으로써 완전한 하나의 씬을 완성한다.
끝과 끝이 맞닿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가장 불완전한 것들이 맞닿는다고 할 수 있다. 색을 품은 빛의 가장 끝자락이 맞물린다, 계절의 끝자락이 맞물린다, 낮의 끝자락이 맞물린다. '맞물리다'는 '맞물다'의 피동사로서, '끊어지지 아니하고 잇닿게 되다.'라는 뜻을 지닌다. 결국 맞물린 끝자락은 시발점이 된다. 새로운 색의 시발점, 새로운 계절의 시발점, 새로운 시간의 시발점.
이러한 측면에서 맞물린다는 표현은 꽤나 매력적이다. 노을이 황혼의 시간을 통해 낮과 밤을 연결하듯, 어떠한 것의 끝자락이 맞물릴 때의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사람들이 왜 노을이 지는 시간을 사랑하겠는가. 맞물림은 또 다른 시작이다. 균열은 경계이고 틈이며, 역설이고 그로 인한 움직임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의적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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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_아르코미술관 <정재철: 사랑과 평화>]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나요? 저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나의 하루를 다시금 들여다보는 것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만의 언어로, 나의 냄새가 물씬 풍기도록 표현하는 것을 사랑합니다. 새로운 것을 보며 같은 감정을 느끼고, 익숙한 것을 보며 새로운 감정을 느껴요. 제게 낯선 것들을 매일 함께 하는 사람과 즐길 때의 감정을, 새로운 사람과 내게 익숙한 것들을 즐길 때의 감정을 사랑해요. 그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활자에 새겨 넣고자 하는 욕망이 강합니다. 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글을 쓰는 것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어쩌다 보니 나의 강박적 행위가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수련회 때였다. 하루 동안 느낀 것들이 그렇게나 많았는지, 소등 후 깜깜한 숙소에서 수첩도 아니고 관광지 소개 브로셔에 내가 느낀 모든 것들을 검은 모나미 볼펜으로 휘갈겨 썼다. 다음 날 아침, 뭐라고 썼는지도 모르는 글자들이 이리저리 겹쳐있었다. 그게 내 강박의 시작이었다. 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잊지 않겠다는 욕망이 뒤섞인 강박.
사랑하는 것의 강박적 행위
혜화에 위치한 아르코 미술관에서는 현재 작가 정재철(1959-2020)의 작고 1주기전으로 작가의 작업세계를 조망하는 기획초대전 <정재철: 사랑과 평화>가 진행 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장소를 이동하며 수행했던 참여 형식의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통해 그가 지향한 예술적 실천에 한 걸음 다가가고자 한다. 전시는 총 두 전시실로 나뉘어 있으며, 각 공간은 공통의 목적성을 지니며 각자의 분위기를 뿜어낸다.
정재철의 작가 노트 일부에는 ※놀이: 놀고 있다고 하기엔 그 놀이조차 수단으로 쓸 만큼 나는 확실한 작가이므로 그것은 제외될 수밖에 없다.라고 적혀있다. 그의 작업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매 순간순간을 자신의 작업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실크로드 프로젝트>
제1전시실에서는 정재철의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사진, 영상, 루트맵, 여행일지 등으로 재맥락화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기록과 수집된 결과물 하나하나는 나의 가슴을 여러모로 쿵쿵 쳤다.
#1
제1전시실 입구는 지인들이 그에게 보낸 편지와 엽서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사람의 편지를 몰래 읽는 것만큼 은밀한 일이 있을까? 한동안 편지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편지 속에는 왜 이렇게 연락이 되지 않느냐는 푸념과, 브루클린에 방문하자마자 너의 작품을 보러 소크라테스 조각공원에 다녀왔다는 소식, 함께 담배 피우며 마시던 소다가 그립다는 추억팔이, 러시아에서 작업을 하기 위해 있다는 소식과 더불어 네가 올해 모리셔스로 작업을 하러 왔으면 좋겠다는 애정 섞인 끝맺음말 등이 녹아있다.
어렸을 적 친구들 사이에 유행했던 100문답 같은 것들이 쓸 때면 꼭 이런 게 하나씩 있었다. "내 보물 1호는?"과 같은 질문 말이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 몇 명의 대답을 차지했던 건 "편지 상자"였다. 지금은 뜸해졌지만 내가 초등학생, 중학생일 때까지만 해도 손편지가 유행이었고, 심지어 교환일기도 썼더랬다. 예쁜 편지지부터 조그마한 노트, 심지어 이면지에까지 오늘 급식에 탕수육이 나온다더라, 아직 2교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기다리냐는 의미 없는 말들을 편지라는 말로 포장해 전하곤 했다. 그런 낭만이 있었다. 과거의 낭만적인 일들을 되새기는 일은 여전히 내 가슴이 쿵쿵 뛰게 한다.
#2
정재철은 자신이 기획한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각 언어로 된 안내문을 만들었다. 이 언어들에는 영어, 힌두어, 펀잡어, 네팔어, 중국어, 위구루어, 우루두어가 해당한다.
이는 정재철의 <1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 루트맵 드로잉 1>(2006)으로, 그가 실크로드 프로젝트로 방문한 경로를 다수의 루트맵 드로잉으로 남긴 것이다. 이 루트맵 드로잉 속에는 1차 여정의 종료 이후 경로와 지역을 기록하고, 2차, 3차의 계획이 담겨있다. 다음 여정의 예견된 장소와 시간의 기록이 그려진 루트맵에는 이미 종료한 이 프로젝트에 시간성을 기입하고 과거의 정재철이 향했던 내일을 마주치게 한다.
실크로드 프로젝트에 해당하는 여러 기록과 수집들 중, 내 가슴을 가장 쿵쿵 뛰도록 한 것은 바로 작가의 삶과 가치관 그 자체였던 여행일지이다.
아래는 그의 여행일지 일부이다.
관련 이미지, 아래 링크 글 참조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을 일기로 쓰기도 하고, 생활에 필요한 그 나라 언어를 메모해 두기도 하고,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영감 삼아 머리를 떠다니는 생각들에 기반을 둔 창작을 하기도 한다. 정재철은 국가의 경계를 넘으며, 길 위에서 폐현수막을 나누어주고 뜨거운 태양 아래 그늘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연한 만남, 교류, 사건과 상황을 만들고 기록하였다. 정재철에게 여행이라는 이동과 길 떠남은 곧 삶의 방식과 예술적 실천이었다.
10년째 꾸준히 일기를 쓰고 있는 나로서 정재철의 여행일지는 적잖은 동질감으로 시작해 향수로 이어졌다. 내가 살면서 가장 열렬히 썼던 때는 아무래도 2019년 8월 16일부터 5개월 하고도 하루가 더 되는 그 기간 동안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동안 총 세 권의 일기장을 가득 채웠다. 첫 번째 일기장은 더블린으로 유학을 다녀온 친구가 갤러리에서 내가 떠올랐다며 사다 준 '글을 쓰는 여자가 그려진 짙은 바다색 노트'였고, 두 번째 일기장은 프랑스 릴의 플라잉타이거에서 구매한 '3유로 정도의 아이보리색 노트', 세 번째 일기장은 귀국 무렵 빠리에서 구매한 '이봉 랑베르의 하얀색 하드커버 노트'였다. 나는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는 끊임없이 꿈을 꾸며 그 꿈을 "마음껏" 글로 쓰고, 사진으로 찍고, 그림으로 그리고, 노래로 부르며, 춤으로 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3
<실크로드 프로젝트>에서 드러나는 이동, 이주의 움직임은 작가노트에 하나씩 지워간 달력, 과거로부터 온 편지와 우편엽서, 그리고 정재철의 기록의 파편을 이어 붙이는 백종관의 영상으로 이어진다.
1차 실크로드 프로젝트(실크로드 프로젝트) 영상은 세탁, 포장, 전달, 재방문을 통한 기록의 과정, 2차 실크로드 프로젝트(뉴 실크로드 프로젝트) 영상은 현지인들과 공동 제작하고 그늘을 만드는 과정, 3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영상은 현지 수공예 장인들의 참여로 점차 자라나는 실크로드 프로젝트 과정을 담고 있다.
전시의 제목인 '사랑과 평화'는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마지막 여행지였던 영국 런던의 팔리아먼트 광장 (Parliament Square) 반전시위캠프의 천막 위에 적은 문구다. 작가의 작업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사랑, 그리고 평화는 사회 참여적 프로젝트를 통해 지향했던 공동의 지평을 드러낸다.
이는 곧 제2전시실과 이어지며, 결국 이 전시는 수행하는 몸으로 경계 이동을 실천했던 작가의 태도와 공유지에 대한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순환하는 사물에 드러나는 그의 생태에 대한 사유를 좇는다.
<블루오션 프로젝트>
제2전시실은 '사물의 물질성에서 발굴한 순환적 가치와 생기'라는 작가의 태도를 보여준다. 정재철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조각에 대한 조형적 관심과 동시에 사물 자체에 내재한 힘과 생기에 대한 인식, 나아가 생태에 대한 사유를 엿볼 수 있다.
오래된 꿈
예전에 친구랑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C: 교양 수업으로 철학을 듣는데 오래된 꿈에 대해서 배웠다?
K: 오래된 꿈?
C: 응. 근데 오래된 꿈이라는 단어 참 모순적이지 않어? 꿈은 계속해서 꾸는 건데 오래된 꿈이라니.
K: 그러게... 근데 또 가슴 한켠에 있는 어렸을 적 막연히 꾸던 순수한 꿈 하나쯤은 가지고 사니까.
나는 꿈이 많고, 오래된 꿈들도 많다.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고, 그것에 대한 브레인스토밍을 비롯한 상상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넘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김주현이라는 사람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이를 이루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도 고안하던 그런 때가 있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구석에 숨겨둔 나의 오랜 꿈을 꺼내어 볼 수 있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자신이 의도한 작업물들을 설치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뛰며 현지인들과 소통하고, 구현을 위해 시뮬레이션하고, 실제로 설치해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까지의 나에게 정재철 작가의 모든 과정은 나의 오래된 꿈을 실현하고 있는 행동가로서 보였다.
나는 예술가를 존경한다. 예술가를 비롯한 모든 표현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머릿속의 '무엇'들을 끝끝내 가시화해내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글, 그림, 음악, 사진, 패션, 영화, 건축, 미술, 조각 등의 창조자들을 존경한다. 창조자(creator)는 곧 행동가(doer)이고, 행동가는 곧 사상가(thinker)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를 마음껏 글 쓰고, 사진 찍고, 그림 그리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꿈을 꾸게 하는 여행을 사랑한다. 여행은 나로 하여금 가슴 한켠의 오래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무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오래된 꿈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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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_아트선재 ] The New Vision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존의 체제에 신물을 느끼고 새로운 세상으로의 변혁을 꿈꾸는 비트 세대가 등장하였다. 이를 다룬 존 크로키다스의 영화 <킬 유어 달링>은 그 시작을
공간(空間)
현재 아트선재센터에서는 세 가지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이중에서도 시셀 마이네세 한센, 김지선, 레이철 로즈가 참여한 전시
실제(實際), 실재(實在)
주인, 주체의 의미를 갖는 '호스트(host)'와 게임이나 자동차, 프로그램 등의 작동 메커니즘을 임의로 변형한 것을 의미하는 신조어 '모드(modded)'를 합성한 전시
어제 먹은 레몬 마들렌 엄청 맛있었는데, 아 어제 날씨는 좀 흐렸네, 그래도 카페에 사람이 많이 없어서 좋았어, 그 카페는 통유리창이라 밖이 다 보여서 좋아.
이처럼 우리는 기억을 다시 떠올릴 때나 무언가를 생각할 때, 그 공간을 함께 상상한다. 누구에게나 있는 의식 속에서 공간을 인지하는 감각은 언어의 변화나 과거 경험의 차이로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전시는 스크린이나 모니터 등 화면 안의 공간에 익숙해진 세대가 대상을 인지하는 다른 감각을 갖게 된 것을 의식한다. 어렸을 때부터 비디오나 전자기기 속 화면을 쉽게 접하면서 화면 안의 공간감에 익숙해지거나, 게임을 하면서 평면적인 화면에 대한 경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거나, 영화를 보면서 과거와 미래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상상에 익숙해져 있거나, 가상세계에 익숙해지면서 실제를 인지하는 감각에서 벗어난 경험이 반복될 때 이러한 감각이 실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전시는 '정상적인' 감각이나 신체성에 대해 재고하고 있다.
변화된 시대 속에 변화된 실제(實際)라는 개념이 결국엔 실제가 되어, 그 세계 속 실재(實在)함이다.
Host(호스트)
전시는 신체를 둘러싼 세계의 물리적 조건이 변하지 않았음에도 이를 다르게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신체를 갖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한다는 것을 전달한다. 본질적 존재의 다른 신체로서 '호스트'라는 이름을 제안하며, 공간이나 대상을 인지하는 특정한 신체성을 의식하고자 한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부캐'에 이를 대입하면 이해하기가 훨씬 쉬울 것 같다. 사람들은 본질적 존재인 '나'의 여러 가지 면모 중 하나를 '부캐'에 대입한다. 본질적 존재인 '나'가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달라진 경험을 다르게 감각하는 신체를 '호스트'에 대입하며, 신체를 둘러싼 세계의 물리적 조건이 변하지 않았음에도 이를 다르게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신체를 갖게 된 것임을 뒷받침한다.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은 관객이 직접 플레이어로 참여할 수 있었던 김지선의 <슬픔의 집>이다. 전시장 한편에 마련된 독립적 공간 속에서 관객은 작가가 개발한 게임 '슬픔의 집'의 플레이어가 되어 가상세계를 누린다. 이 게임은 작가가 페루의 아마존을 여행하던 중 만난 친구 '민'에게 받은 게임의 일부를 수정하여 완성되었다. 게임 '슬픔의 집'은 다른 게임들과는 다르게 이겨야 할 경쟁 상대가 없고, 제시된 가상 세계 속의 '슬픔의 집'을 산책하듯 진행된다.
또한, 플레이어가 된 관객은 직접 화면 속의 인물과 대화하며 가상세계 속 공간의 소실점은 더욱 깊어진다.
그 끝에는 '슬픔의 집'이 과연 존재했는지 질문하게 된다.
김지선은 이 전시에서 자신이 개발한 게임을 기반으로 진행되는 영상 <슬픔의 집 - 집>(2021)을 통해 관람자를 플레이어의 자리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이 외에도 작가들은 각자의 매체 속 다르게 감각하는 '호스트'의 신체성을 탐구한다.
레이첼 로즈의 <1분 전>(2014)는 재빠르게 진행되는 시공간의 변화와 함께 이를 감각하는 신체가 암시된다. 여러 개의 공간과 시간이 만났다가 금세 미끄러지는 이 자리에서 단절을 감각하는 신체의 실존이 환기된다.
시셀 마이네세 한센의 <최종 사용자의 도시 2077>는 감시 기술의 전문가이자 최고경영자인 알렉스 카프의 목소리를 가지고, 키아누 리브스의 얼굴을 하고, 세계 감시 자본주의자들의 얼굴로 한 몸을 가진 이 존재를 통해 2077년 어느 '최종 사용자(End-user)'의 도시를 소개한다. 조이스틱을 조작하며 시작하는 세 가지 영상 안에는 섹스 로봇이 도시의 감시자로 등장한다. 이 로봇은 최종 사용자들의 도시에 인간들과 겉으로는 다를 바 없이 존재하여 감시체계를 통제한다. 전시의 작품 설명에 따르면, 마이네세 한센이 제시하는 유사 인간의 형태는 인공적이고, 반사회적이며, 임시적인 신체성을 가진다. 당연한 신체를 낯설게 만드는 형상들은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원초적인 신체적 행위에 대한 감각의 변화뿐만 아니라 대상과의 애착관계/(사회적, 구조적) 거리감에 대해 변이 된 인지를 징후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변화 - 실제(實際) - 실재(實在)
공간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공간(空間)
1. 아무것도 없는 빈 곳.
2.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범위.
3. 영역이나 세계를 이르는 말.
변화로 인해 이전에 실제(實際)하지 않았던 것들이 실제(實際)하며, 실재(實在)에 이른다. 이 모든 것들의 사이에는 공간(空間)이 존재한다. 이때의 '공간'은 그 첫 번째 의미,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이다.
비어있는 사이, 공간(空間)
변화가 생기기 위해서는 빈 틈이 필요하다. 그 공간과 공간들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세상을 변화시킨 여러 '틈' 중 하나로 미국의 1950년대, 비트 세대의 출현을 들 수 있다.
'틈'을 비집고 나온 Beat Generation(비트 세대)
평론가 어빙 하우는 미국의 1950년대를 "순응의 시대(The Age of Conformity)"라고 비판했으며, 시인 로버트 로웰은 문학과 지성이 "진정제를 맞은 시대"라고 탄식했다.
1950년대 미국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획일화, 동질화, 물질주의, 검열 등의 양상으로 개인은 사회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체제에 대항하며 기성세대의 주류 가치관을 거부한 세대가 바로 비트 세대(Beat Generation)이다. 이들은 체제에서 벗어나 시를 쓰고, 재즈에 맞추어 춤을 추는 등의 감각적 의식을 통한 개인적 해방을 주장했다.
영화 <킬 유어 달링>의
Howl
who poverty and tatters and hollow-eyed and high sat up smoking in the supernatural darkness of cold-water flats floating across the tops of cities contemplating jazz,
그들 가난하고 남루하며, 텅 빈-눈으로 약에 취해 냉수만 나오는 아파트의 초자연적 어둠 속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도시 옥상을 떠돌며 재즈를 음미하던 자들,
who sang out of their windows in despair, fell out of the subway window, jumped in the filthy Passaic, leaped on negroes, cried all over the street, danced on broken wineglasses barefoot smashed phonograph records of nostalgic European 1930s German jazz finished the whiskey and threw up groaning into the bloody toilet, moans in their ears and the blast of colossal steamwhistles,
그들 창틀에서 절망의 노래를 부르다 지하철 창밖으로 추락해, 불결한 퍼세익 강으로 뛰어내린 다음, 흑인 구역으로 도약해 온 시내를 울고 돌아다니며, 깨진 와인 잔 위에서 맨발에 고주망태로 춤을 추다 향수 어린 유럽 1930년대의 독일 재즈 음반이 위스키 곡을 마치자 신음하며 지독한 화장실로 던져 올려져, 귀에서 신음과 엄청난 기적 소리의 폭발음을 들었던 자들,
and who therefore ran through the icy streets obsessed with a sudden flash of the alchemy of the use of the ellipsis catalogue a variable measure and the vibrating plane,
그래서 이제 그들이 얼음장 같은 거리로 뛰어나갔다. 생략과 나열과 운율 떨리는 평면을 활용한 연금술이 가져다 줄 갑작스런 섬광에 집착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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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리뷰_원앤제이 <평행///연결>] 이분법적 세계관 속에서 예술가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게임 중에 '밸런스 게임'이라고 있다. 상반된 A와 B 중에서 무엇 하나를 꼭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것을 택할 것인지 정하는 게임이다. '짜장면 vs 짬뽕'부터 시작해서 '한 달 동안 집 안에서 서서 자기 vs 공원 벤치에서 누워서 자기', '평생 물만 마시기 vs 다른 음료 다 마실 수 있는데 소변 한 방울씩 섞여있기' 등 둘 중 어느 하나 선택하고 싶지 않은 질문들도 즐비하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 하나를 해보겠다. 'Dreamer(몽상가) vs Realist(현실주의자)'
Error Value, 오류 값
북촌에 위치한 갤러리 One And J. (원앤제이)에서 진행하고 있는 <평행///연결>에 다녀왔다. 이 전시는 그룹전으로 박선민과 이의록이 참여했으며, 전혀 교차점을 가지지 않는 두 사람의 작품을 통해 평행함과 그것들의 연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두 작가의 작품들은 양극을 향해 멀어져 가는 듯 보이며, 전시는 이를 평행시킬 뿐이다. 원앤제이 갤러리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우주(블랙홀)와 미생물(버섯)이라는 아주 큰 것과 아주 작은 것에 각각 관심을 갖고, 전혀 다른 태도와 관심으로 작업하고 있는 두 작가의 작품을 한 공간에 평행하게 구성한 영상과 사진, 설치 10 작품을 통해 교차지점이 없어 보이는 작품의 이미지들이 겹쳐 보이게 하며 현실과 무관해 보이는 것들과 현실이 맞닿아지는 경험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음이다. 이를 바라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 사이의 거리인 '차이'를 사유하는 동시에, 온전하게 소유할 수 없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통해 평행하는 공간을 가로지르며 연결해보기를 요청한다.
이분법적 세계관 속 평행과 연결
1. 전시는 이인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섞이지 않는 두 사람의 작품을 드러내며 평행함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이인전이다.
2. 전시는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작가의 작품들은 각 층에 나누어 전시된다.
1층과 2층이라는 공간의 차이 속 두 작가는 분리되어 있으며, 전시는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는 두 층의 전시장 사이를 연결하는 계단을 오가는 사건으로 구성된다.
3.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의록은 아주 큰 것(우주/블랙홀)에 관심을 가지며, 세계의 구조와 조건들을 인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작품을 만들고, 박선민은 아주 작은 것(미생물/버섯)에 관심을 가지며, 대상과 신체의 맞닿음으로 직접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작품을 만든다.
4. 관객의 경험은 양극의 이미지들을 다시 세계로 재구성하며, 양극을 오가는 계단 위에서 이 이미지들이 중첩되었다가 흩어지며 통합되지 않고 오히려 파편화되어 재배치되기를 유도한다.
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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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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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
이미지와 언어
영상에 등장하는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를 통해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알 수 있다. 이의록의
Dreamer(몽상가) vs Realist(현실주의자)
세상의 모든 것들에는 양극(兩極)이 존재한다. 양극(兩極)이란 사전적으로 화학에서의 양극과 음극, 지구에서의 북극과 남극을 일컬으며, 서로 매우 심하게 거리가 있거나 상반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다림과 좇음, 영원과 순간, 극소와 극대. 이러한 양극에는 그 사이의 거리, 즉 '차이'가 존재하며, 우리는 이 틈 속에서 쉴 새 없이 갈등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쩌면 가장 극적인 것들이 가장 조화로울 수 있다고. 즉, 상반되는 양 극단은 독립적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배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몽상가들(The Dreamers)>을 보고서는 다른 사람들의 평을 읽어보았다. 평들은 하나같이 영화 속 인물들의 '몽상'에만 초점을 맞추는 듯하였다. 현실과 양극에 존재하는 '몽상', '꿈'이라는 형체 없는 공간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꿈, 청춘, 이상 등의 단어를 말하며 현실, 혁명, 이성과는 함께 쓰일 수 없다는 듯 대비시킨다. 하지만 끝내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였는가. 지극히 몽상가였던 이사밸과 태오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극히 몽상가이기에 지극히 이성적일 수 있다고. 이 양극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함께여야 존재할 수 있음이라고.
양극은 존재하지만 모든 것들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세계관 속에서는 예술가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이어질 수 없는 대립되는 무언가들이 평행하며, 또 그것들이 중첩되는 어느 부분에서는 연결될 수 있음이 자연스러운 것, 그리고 그것이 예술의 시작이며 표현과 해석의 자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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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리뷰_뮤지엄헤드 <인저리타임 Injury Time>] 나는 지금 어떤 직선 위를 걸어가고 있는가
하나의 직선은 수많은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수많은 점들 중 하나에 위치하여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어딘가에 위치하는지, 무엇을 이루어 가는지 잊어가며 우리를 잃어간다. 끊임없이 1인칭 시점으로 나를 들여다보며, 2인칭 시점으로 나를 되돌아보고, 3인칭 시점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로써 과거가 생성하고 있는 현재의 어긋남, 그 시공의 연쇄를 받아들이며 과거와 현재라는 두 세계의 교차가 만들어 내는 시차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Q. 두 세계의 교차가 만들어 내는 시차
2019년도에 5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냈다. 그 당시 프랑스는 한국과 7시간의 시차를 가지고 있었다. 중간에 써머타임이 종료되면서 8시간의 시차가 생기기도 했지만, '나'라는 사람에게 그 정도의 시차는 오히려 더 나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줬던 적당한 시차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공간의 차이는 시차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시간의 차이는 어떠한가. ‘오늘의 나'와 ‘이전의 나' 사이에는 어떠한 시차도 존재하지 않는가. 이번 전시는 그것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한다.
강재원, 곽인탄, 오은, 이충현, 최태훈 총 5명의 작가가 참여한 뮤지엄헤드의 전시 <인저리타임 Injury Time>에 다녀왔다. 인저리타임(Injury Time)은 주로 축구경기 총 90분의 시간 이후에 부상이나 다른 요인들로 인해 지연된 시간만큼을 추가로 배정하는 추가시간을 의미한다. 기획자의 말에 따르면 이 전시는 오늘의 조각이 일종의 추가시간에 위치한다고 가정하며 그것이 어떤 부상을 축적, 극복하는지 또 어떻게 현재를 생성, 역전하는지 질문한다는 것이다.
다섯 명의 작가들은 각자 오늘의 자신과 하나의 직선을 이루고 있는 이전의 자신을 '현재'라는 시공간으로 불러온다. 그들은 그렇게 형성되는 '어긋난 현재'와 '두 세계의 시차'를 직접 마주하며 갈등과 더불어 여전히 새로운 충돌과 이동에의 열망을 표출한다. 기획자는 이러한 작품의 연속성을 "종료되지 않는 과거를 현재의 시공에서 결정하고, 이미 지난 무언가가 역전되는 상상을 하며" 자신이 게재했던 미래를 선행한 과거의 글 <인저리타임>을 재구성한 후 같은 제목의 전시에 이어 붙였다.
인저리타임, 어긋난 현재의 연쇄
이번 전시에서 나의 발걸음을 가장 오랫동안 멈춰있게 했던 작품들은 바로 아래의 곽인탄의 작품들이다.
곽인탄은 자신의 작업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파편들을 모아 조각적 형태를 구성하는 시도로 설명한다. 요즘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의 파편들로 잠에 잘 들지 못하는 나와의 동질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그의 작품들에 눈이 갔다. 형태와 질감의 끊임없는 중첩과 반복은 강박을 마주하는 과정과 닮아있으며, 이는 또 새로운 구조로의 재구성이기도 하다.
<동세21-1>(2021)은 눈, 입, 귀, 발, 손 등의 인체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한 인물로서의 형태를 보인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점은 과거 그의 <강박의 통제 불가능성>(2020)과 하나의 직선을 이루며 더욱 유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곽인탄의 <동세21-1>(2021)은 자신의 지난 개인전에서 선보인 <강박의 통제 불가능성>(2020)과 <지옥문 위에 앉아있는 사람>(2020) 속 인물을 해방시켜 어디론가로 빠르게 이동시키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말 그대로 나는 이번 전시에서 마주한 <강박의 통제 불가능성>(2020)을 통해 어떠한 틀에 갇힌 존재의 억압됨과 그것의 발버둥 침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연쇄된 작업물인 <동세21-1>(2021) 또한 현재라는 시공간에 존재한다고 해서 단순히 과거의 것들의 해방의 결과물이 아닌, 여전히 충돌과 이동의 열망을 표출하고 있는 역동성을 지닌 작업물이라 느껴졌다.
과거의 파편들이 충돌하고 이동하여 결국 현재의 파편을 이루며 현재의 유의미한 파편으로 자리 잡는다. 언젠가는 현재의 이러한 파편 또한 미래, 즉 미래 시점에서 현재의 유의미한 파편으로 자리 잡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측면에서 과거의 조각을 현재로 가져오는 인저리타임으로써 형성된 '어긋난 현재'는 하나의 직선을 이루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게 한다.
곽인탄의 또 다른 작품인
이 외에도 작가들은 각자의 인저리타임으로 형성된 '어긋난 현재'로 인하여 하나의 직선을 이루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독립된 개체로 바라본다.
강재원은 과거 자신의 작업물의 형태를 왜곡하고(Skew), 비틀고(Twist), 구부리며(Bend), 하중을 가하는(Gravity) 등의 효과를 적용한 결과물
최태훈은 2018년부터 수차례의 전시를 통해 DIY 제품의 기본 유닛들을 자의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종의 해킹 조각을 선보였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앞선 전시들의 상이한 조형 방식을 하나의 작업으로 소환해낸다. 이는 곧 이 작가가 '어긋난 현재'를 생성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일 것이다.
A.두 세계의 교차가 만들어 내는 시차
공간의 차이는 시차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시간의 차이는 어떠한가. 오늘의 '나'와 이전의 '나' 사이에는 어떠한 시차도 존재하지 않는가. 이번 전시는 그것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한다.
1차원은 직선, 2차원은 평면, 3차원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입체공간, 4차원은 3차원에서의 시간과 공간이 별개가 아닌 하나로 존재하는 시공간을 의미한다. 3차원에서는 공간좌표인 (a, b, c)만 존재하였다면, 4차원은 공간좌표 (a, b, c)에 시간 좌표 d가 추가된 (a, b, c, d)의 형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 전시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시공간이 존재하는 4차원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추가시간에 해당하는 오늘의 조각이 충분히 현재를 새롭게 생성하고 역전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의 나'와 ‘이전의 나' 사이에는 분명한 시차가 존재한다. 그 시차는 현재의 노력으로 줄어들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하며, 나아가 자신에게 맞는 적절한 시차를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직선 위를 걸어가고 있는가
지금이 나에게 주어진 과거의 추가시간이라면, 나는 어떤 선택으로 현재를 재구성할 것인가.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한다. 내가 지금 이 순간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가 내가 그어 놓은 직선의 방향을 선택하기도 하고, 그것의 모양을 결정하기도 한다. 며칠 전 나의 물음에 대한 친구의 대답은 나에게 본질적인 해답을 가져다주었다.
"우리가 하나의 직선 위에 놓여있다면 지금 내가 하는 이 선택이 나의 직선을 조금 울퉁불퉁하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엔 멀리서 보면 곧은 직선을 이루지 않을까?"
"그래. 그리고 혹시 아니? 너 선택으로 조금 튀어나간 그 직선이 결국 나중엔 별 모양을 만들지도 모르잖아."
맞다. 맞는 말이다. 꼭 인생을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직선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는가. 나의 모양을 만들어 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왜, 아니 사람들은 왜 직선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가. 그 이후로 정했다. 나는 파도의 물결을 닮은 곡선으로 살아가겠다. 당신은 어떤 모양의 선 위를 걸어갈 것인가 생각해보기를 바라며, 윤도현의 노래 <생일>로 글을 마친다.
온 우주의 별자리들을 다 헤매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 사막의 중심에서
나는 나의 죄를 닮은 밤하늘을 향해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중략>
나의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나의 죄를 닮은 밤하늘
이젠 너도 사랑할 수 있다
윤도현, <생일> 中
언젠가는 우리도 우리가 과거에 내린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그리고 그것이 형성한 어긋난 현재인 오늘의 조각을,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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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_고레에다 히로카즈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살아가는 오늘의 아이들을 위하여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는 누구도 탓하지 않는 절제 속 영화를 본 관객으로 하여금 성찰의 시작점을 제시해준다.
영화는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영화 자체는 빈 컵과 같다. 그 컵에 감정이라는 물을 채우는 것은 관객이므로 등장인물들이 자신들의 감정으로 컵을 다 채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무비위크 170호 인터뷰 中
사랑하는 것의 반대말은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
<아무도 모른다>에는 아빠가 다른 네 남매와 그들의 엄마가 등장한다. 네 남매의 장남 아키라는 경제적 가장인 엄마보다도 가정을 유지시키는 데에 있어 큰 역할을 지닌 실질적 가장이라 할 수 있다. 집 안의 모든 일을 도맡으면서도 엄마의 저녁식사까지 챙겨주는 모습을 보이니 말이다. 제한된 생활과 규칙 속에서 그래도 '엄마'라는 존재와 함께였기에 웃을 수 있었던 아이들의 표정 속에는 너무 많은 것들을 짊어져야 했음이 보인다.
분홍색 캐리어
분홍색 캐리어는 영화의 시작과 끝을 연결시키며 스토리를 극대화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대조시켜 감정의 깊이를 더한다.
· 아무도 모른다 - 아무도 모른다
영화는 분홍색 캐리어를 들고 모노레일을 타고 있는 아키라와 사키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무도 모른다.' 그 순간이 어떤 순간이었는가를 영화를 다 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를 알기 전까지는 결코 가늠할 수 없는 현재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모노레일 장면으로 돌아와 아키라와 사키가 분홍색 캐리어를 공항 옆에 묻어두고 돌아오는 장면으로, 그리고 남은 아이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아무도 모른다.' 아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캐리어를 공항 옆에 묻어 뒀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지는 결코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 행복 - 슬픔
영화 초반, 아키라 가족이 이사를 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분홍색 캐리어는 '행복'이다. 아빠는 모두 다르지만 서로 의지하며 행복한 생활을 하는 네 남매와 그들을 사랑해주는 엄마라는 존재로 이루어진 한 가족의 삶은 행복했다. 엄마가 늦게 들어와도, 집에서 소리를 지를 수 없어도, 베란다에 조차 나갈 수 없어도, 학교에 다니지 못해도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 처음 집으로 이사 올 때 시게루가 숨어있던 분홍색 캐리어에는 이제 유키가 들어가 있다. "키가 컸구나 유키." 여기서부터의 분홍색 캐리어는 '슬픔'이다.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고, 이 상황에 화가 나며, 계속해서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관객인 나에 대한 무력감 등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긴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라는 존재가 부재한 한 가족의 삶은 뿌리가 뽑힌 나무처럼 흔들린다. 그들의 엄마는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버리고 떠났다. 그렇게 한 가족이 해체되었다. 사랑하는 것의 반대말은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었다.
베란다
베란다는 규칙으로 제한된 공간에서 규칙을 깨는 공간으로 바뀌며 영화의 흐름을 바꾼다.
· 나갈 수 없는 금기의 공간
이 가족의 규칙 중 하나는 베란다에 나가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 규칙을 절대 어기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가 떠나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돌아오겠다던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아이들은 그 금기를 하나씩 깨기 시작한다. 유키는 맞지도 않는 뽁뽁이 신발을 신고 외출을 하고, 시게루는 장난감을 베란다로 날려 베란다에 나가서 놀기 시작한다. 아키라는 가장이라는 무게에서 잠시 벗어나 친구들을 사귀어 놀기 시작한다. 마치 금기를 깨기라도 하면 엄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한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다.
· 버려진 씨앗들로 무성해진 생명의 공간
'현관에 꺼내 놓은 신발 한 줄.' 이동진과 김중혁의 영화당 #214에서 김중혁은 최고의 한 줄로 대사가 아닌 아이들의 신발 한 줄을 꼽았다. 벚꽃이 만발한 때에 이들은 함께 외출을 한다. 마치 엄마가 돌아오신 것처럼 행복한 모습으로. 엄마가 돌아오면 결코 할 수 없는 함께하는 외출인 것이다.
"형, 씨야"
"누가 버리고 간 거 아니야?"
"불쌍하다"
"여기도"
"둘, 셋, 넷, 다섯"
"이거 진짜 많다"
아이들은 버려진 씨앗을 집으로 가져와 베란다에 키운다. 다 먹은 컵라면 용기에 흙을 담고 씨앗을 심어 물을 주며 버려진 생명이 버려진 생명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이 생명들이 잘 자랄 수 있을까? 걱정과 달리 베란다는 어느새 초록 생명들로 무성해진다. 아이들의 상황은 계속해서 열악해지는데 베란다의 식물들은 무성히도 자란다. 아이들은 힘들게 공원에서 받아온 물을 식물에게 준다. 식물이 이렇게 무성히 자란 데에는 아이들이 물을 준 덕분이겠지만 그 속엔 생명에 대한 아이들의 꾸준히 관심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버림받은 아이들이 생명을 여기는 모습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어쩌면 이 아이들도 베란다의 식물처럼 무성히 자라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말이다.
무수히 오르내리던 계단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가 있을 것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눈이 올 때나 비가 올 때나 항상 지나가게 되는 장소. 집에서 나가 어딘가로 향해야 할 때 꼭 거쳐야 하는 곳이 이 아이들에게는 계단이라는 장소이다. 아키라 혼자 장을 봐서 들어올 때도, 아이들 모두가 손을 잡고 놀러 나갈 때에도, 공원에 물을 뜨러 갈 때에도 계단을 따라 올라가고 다시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올라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들의 사회, 내려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들의 삶이다. 왜 감독은 이 둘의 공간을 이렇게 분리해뒀을까.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가는 속도, 아이들 사이의 거리와 표정으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엇들을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들이 처한 상황마저도 한참을 내려가야 있는 그들의 삶의 공간처럼 아이들만의 힘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이 사회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 영화에는 관객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며, 관객에게는 이 영화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는 아무도 탓하지 않으며 영화 속 그 누구도 울지 않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는 영화가 지향해야 하는 윤리성과 동시에 영화가 담아야 하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간격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소년의 옆에서 어깨를 다독여주고자 했다. 안아주는 건 안 된다... 나도 카메라도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자신이 영화를 찍으며 유지하고자 했던 시선을 위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감독이 말한 '거리'를 존재할 때 아름다운 '간격'이라고 말하고 싶다. 삶을 살아가면서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알고, 모두와 가깝고, 모든 일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썩 괜찮은 삶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어떤 것에서든 '거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거리를 나는 '간격'이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그 간격은 존재할 때 가장 아름답다.
이 영화는 그 간격 속에서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으며 그 모두를 탓하고 있다. 아이들을 버리고 떠난 엄마라는 존재 또한 어쩌면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결코 탓하지 않음이다. 이와 더불어 영화 속 아이들은 그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울지 않는 아이들을 통해 영화는 관객과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가 유지하고 있는 간격은 관객으로 하여금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라는 시선을 부여하며 결국 우리 모두를 탓함이다.
"그래도 살아가는 오늘의 아이들을 위하여."
해결책이 주어지지 않고 끝나는 이 영화의 마무리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력감을 느끼게 하며, 영화가 끝나는 동시에 성찰의 시작이 된다. 나 역시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가 끝나는 동시에 성찰의 시작을 맞이했던 것 같다. 아직 나는 영화가 지향해야 하는 윤리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이러한 방향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도 살아가는 오늘의 아이들을 위하여 더 나은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야겠다.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
밤하늘에 별이 뜨면 별을 보여주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창문을 열어 빗소리를 들려주며, 아침이 되면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게 해 주고, 노을이 지면 노을을 보여주는 나의 아빠와 엄마 같은 삶을 살고 싶다. 아빠와 엄마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
[전시 리뷰_뮤지엄헤드 <나메NAME>]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요즘 혈액형보다도 영향력이 있는 인간 분류법은 MBTI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자신의 SNS 프로필이나 소개 글에 혈액형을 적어두지 않는다. 이제는 그 자리를 MBTI가 대신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MBTI가 자신을 대변하는 사회에서 살아간다. MBTI를 판별하기 위한 수십 가지의 물음 중 하나, “종종 인간 실존에 대한 이유를 생각합니다”.
완전 동의.
종로에 위치한 갤러리 뮤지엄헤드의 오픈전 <나메NAME>에 다녀왔다. 곽이브, 류성실, 이유성, 이환희, 정수정, 최이다, 최하늘 총 7명의 작가가 참여한 전시 <나메NAME>는 이름으로부터 시작된 물음을 이름으로 끝맺는다. 이름은 단순한 문자 그 이상의 것들을 내포한다. 사람은 이름으로 태어나고 이름으로 죽는다. 전시 작가들은 실체가 없는 ‘이름’이라는 것을 연출하고 전시하며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기획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 작가들은 이름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미술에 대해 생각하고 설명하며 각색한다. 또 그것을 거부하고 일어나 달라고 욕을 한다. 이는 곧 작가와 관객을 연결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이들이 전시하는 이름과 그 이름의 뒷면을 적극적으로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무(無)에서 유(有)로, 그리고 존재(存在)로의 귀결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작품은 바로 이 영상작업이다. 갤러리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작품인 이것은 나를 적잖이 충격에 빠뜨렸다. 최이다는 이름 없는 창조물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름이 필요한 목소리로부터 답장을 받는다. 이는 마치 영상을 바라보는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건네는 독백 같기도 하다. 태어나면 당연하게 가져버리게 되는 ‘이름’을 소재로 원래는 무(無)의 것을 유(有)의 것으로, 나아가 의미를 가진 진정한 유(有), 존재(存在)로 나아감을 나타낸다.
無 우선 당신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有 더 중요한 건 언제나 이름을 가진 이가 무엇을 하느냐이다
存在 처음으로 이름을 가져보고 싶다
이 외에도 작가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이름’에 대한 생각과 해석을 전시하고 있다.
곽이브는 자신의 이름을 음소 단위로 나누어 그린 후 여러 장을 벽면에 채운 작업 <곽이브>를 통해 자신을 정의하는 ‘틀’과 ‘테’의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끊어진 형태들은 기존의 의미가 사라지고 새로운 의미를 품게 된다. “이름은 아는 사람에게 의미 있고” 형태는 관심 갖는 이에게 포착된다.(작가노트) 기존의 자신을 정의하던 이름이 새로운 테와 틀과 공간, 즉 형태를 마주하며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다.
최하늘은 <형식을 창조하는 자>와 <형식을 파괴하는 자>를 통해 같은 이름에서부터 파생되었지만 결코 동일시될 수 없는 구상과 추상, 창조와 파괴, 형식과 내용, 이동과 정지, 왼쪽과 오른쪽처럼 완전히 일치될 수 없는 운명을 나타낸다.
존재(存在)의 이유
존재의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왜 내가 이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들지 않는지,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는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마임을 잘하려면 여기에 귤이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돼.” 존재함을 위해서는 부재함을 잊으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왜 존재하느냐’보다 ‘왜 부재하느냐’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더 중요한 것은 ‘왜 존재하느냐’에 집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왜 존재하느냐에 대하여 생각하다 보면 존재에 의미가 생기고, 나아가 실존(實存) 하게 된다. 존재의 이유는 결국 존재함에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이름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인간은 이름으로 태어나서 이름으로 죽는다. 결국 자신을 칭하는 것은 결코 자신이 될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칭해지면서 더욱 굳건히 존재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처럼 말이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중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떤 이름으로 태어나서 어떤 이름으로 죽을 것인가. 인간은 존재하며 사람은 살아가고 이름은 곧 당신의 삶이다.
이미지와 함께 글을 읽고 싶다면, 여기로
[책 리뷰_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변화하는 시대에서 변화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우리는 변화하고 있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정체되어 있다. 우리는 꾸준히 변화하고 있지만 꾸준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정체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변화하지 않는 '나'가 있어야 하기도 하니까.
변화하되 변화하지 않는 것
2021년이 되고 나서야 새해 목표 몇 가지를 정해보았다. 그중 하나가 변화하되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필요에 따라서 감성적 사고보다는 이성적 사고에 초점을 맞추는 것, 충동적이고 즉흥적이기보다는 계획적으로 행동하는 것 등으로 변화하고자 하지만, 어쩌면 나의 본질적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감정에 솔직한 것, 그 감정을 충분히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 등은 놓지 않고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10년이 지나 다시 펼친 책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는 과거의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질문을 나에게 던지고 있었다.
사람은 변화해야 하는가?
스펜서 존슨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의 이야기 속에는 스니프, 스커리, 헴, 허가 등장한다. 이 책은 다시 만난 동창생들이 함께 치즈 이야기를 듣고, 토론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마리의 생쥐 스니프, 스커리와 두 명의 꼬마 인간 헴, 허는 맛있는 치즈를 찾기 위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미로 속을 뛰어다닌다.
잔물결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망하지 않으리, 헨리 데이비드 소로
스니프와 스커리는 치즈 창고를 찾은 기쁨에도 매일같이 일찍 일어나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미로를 통과한다. 시간이 흘러도 그들은 매일 하던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변화를 인지하고자 했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자 했다. 헴과 허는 마음 놓고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했다고 여기는 행복과 성공을 즐겼다. 안정적 생활에 너무 녹아든 것이었다. 그러한 이들에게 변화는 각각 '서서히' 나타났고, '한순간'에 들이닥쳤다. 이러한 '변화'에 맞서는 그들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속에 존재하는 스니프, 스커리, 헴, 허의 모습들로 복잡했다. 변화는 우리의 삶과 함께한다.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 우리는 어쩔 땐 스니프, 어쩔 땐 스커리, 어쩔 땐 헴, 어쩔 땐 허의 모습으로 대처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나'가 어떤 모습으로 지금의 상황을 대처하느냐 일 것이다. 이 작품의 작가는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 다른 선택을 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는 두 마리 생쥐들의 모습을 변화에 대처하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삼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여기에서 본질적인 의문이 드는 것이다. 사람은 변화해야 하는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변화하지 않는 '나'가 있어야 한다.
지금 나의 모습이 스니프와 스커리처럼 변화에 민첩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그런 유의 사람이거나, 헴처럼 새로운 변화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두려워 멈춰있는 사람이거나, 허처럼 새로운 변화가 두려워 잠시 멈추었지만 그 두려움을 없애고 행복을 찾아 떠나는 사람일지라도 모두 똑같은 '나'에서 파생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만나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모든 걸 말하는 투 머치 토커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가만히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굳 리스너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선택은 본질적인 '나'에서부터 파생된 나의 일부 모습들이며, '나'라는 존재를 어느 한 모습으로 단정 짓기에는 섣부르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에 등장하는 네 가지의 인물들이 본질적인 자신의 일부 모습들이라는 거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해결책이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것이기보다는 자신에게 처한 상황에 따른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질 수 있으며, 어떤 다른 말들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만의 '본질적인 무엇'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즉,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변화하지 않는 '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우선 그 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나는 여러 번 이 글을 읽은 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데미안으로부터의 회답이었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소담출판사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 간의 갈등 속, 현재의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세계를 깨뜨려야 함을 깨닫는다. 헤르만 헤세는 이를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로 묘사한다. 그렇게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알을 깨고 나오려는 그 행위는 바로 자신에게 처한 '변화'라는 상황을 인지하고 대하는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결국엔 변화라는 상황에 어떤 태도를 지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인지하고 대응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실제로 누구에게나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있어 실수를 하기도 하고, 후회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알의 한 겹을 깨고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나아가 더 나은 선택은 '나만의 무언가', 즉 나에게 '본질적인 무엇'이 존재할 때에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미 알을 깨고 나온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그 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세계 속의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어떤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모든 인간의 생활은 자신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고, 그 길을 가는 시도이며 좁은 길의 암시이다. 일찍이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그 자신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으로는 그 자신이 되어 보기 위해 어떤 사람은 다소 우둔하게, 또 어떤 사람은 보다 명석하게, 자기의 힘이 닿는 만큼 노력한다. ...<중략>... 우리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밖에 해명할 수 없는 것이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소담출판사
헤르만 헤세는 모든 인간의 생활은 자신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렇게 우리는 다시 그 알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필요충분조건인 '알에 들어가는 행위'를 지각해야 함을 의미하게 된다.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우선 그 알 속으로 들어가야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