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 자전거를 타고 와 벤치에 앉는다. 아이는 난간을 넘어 난간에 등을 기대어 앉는다. 한 손에 빵을 쥐고 먹는다. 바닥에 철푸덕 앉아도 아빠는 뭐라고 하지 않는다. 몇 분 뒤, 아빠도 난간을 넘어 딸의 옆에 앉는다. 같이 해를 맞는다. 벤치는 나무그늘이지만, 난간만 살짝 넘어가면 해를 맞을 수 있다. 아빠와 아이는 아래에 무언가 있나 내려다본다. 아빠는 하모니카를 꺼낸다. 아주 작은 소리가 나게 불어본다. 아빠 주변을 뱅글뱅글 돌면서 짹짹대는 아기.
여기 공원은 아주 살짝 오르막을 올라오면 있는 곳. 그래서 아주 살짝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다. 신촌에 살 때, 러닝하고 메가커피 한 잔 사들고 계단 꼭대기에서 앉아 내려다보며 벌컥벌컥 마시던 때가 생각나는 곳이다. 나만의 비밀공간이 될 것 같은 그런 느낌.
공원의 해는 오후 일곱시 반이면 전체가 그늘로 덮여지기 때문에 네다섯시 정도에 한 중간레 앉으면 그래더 몇시간 해를 맞을 수 있다. 카주미에는 정오부터 오후 두시까지 해가 든다. 그 사이에 가 테라스에 앉으면 해를 맞을 수 있다. 내 방은 일곱시, 여덜시부터 옷장으로 해가 들어와서 사면을 훑고 다섯시, 여섯시가 되면 해가 나간다.
시간 속에서 직접 보고 경험한 것들로 살아가는 것.
케럄/테오/시니야
눈을 감고도 느낄 수 있는 것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바람 눈을 감아도 반짝거리는 햇볕
물론 다 사람 사는 곳이라 비슷비슷하겠지만, 자유롭다고 느낀다 사람들이 해가 강한 날엔 공원에 누워 해를 맞는 모습이, 테라스에 앉아 해를 맞는 모습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하고, 잔디밭에 풀썩 주저앉는 모습이.
나무 그림자 끝에 걸터 앉아, 그 그림자가 나를 완전히 빗겨나가 해가 나를 완전히 내리쬐일때까지. 앉아있는 것.
음 오늘 안나왔으면 어쩔뻔했나 싶은. 예쁜 벚꽃길도 구경하고, 가보고 싶었던 모로코 샵도 구경하고, 거기 주인장 아저씨랑 이야기도 나누고. 벚꽃이 너무 예뻐 들어온 길에서 독일 언니들 사진도 찍어주고, 꽃 구경도 하고.
역시 나오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엄마가 왜 항상 그냥 산책이라도 좀 하고, 커피라도 마셔~라고 하는 이유가 다 있는 거야.
그저 멍 하니 바라보고 있게 되는 것들이 있다. 창 밖의 새소리, 방 안으로 새어들어오는 아침 햇살, 저녁 노을이 창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와 사물을 비추는 것, 나무 그림자
살고 있는 이 삶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람들과 눈을 더 많이 마주치는 내일이 되어야지.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고
나무의 시
아들 미륵이에게, 류시화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 생애가 나무처럼 흔들려야지 해질녘 나무의 노래를 나무 위에 날아와 앉는 세상의 모든 새를 너 자신처럼 느껴야지
네가 외로울 때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너의 나무가 서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그리하여 외로움이 너의 그림자만큼 길어질 때 해질녘 너의 그림자가 그 나무에 닿을 때 넌 비로소 나무에 대해 말해야지 그러나 언제나 삶에 대해 말해야지
그 어떤 것도 말고
한때 네가 사랑했던 어떤 것들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된다. 네가 그것들을 떠나보낸다 해도 그것들은 원을 그리며 너에게 돌아온다. 그것들은 너 자신의 일부가 된다.
백조는 일생 동안 울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단 한 번 아름다운 소리를 내어 울고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흔히 예술가들의 마지막 작품을 ‘백조의 노래’라고 일컫는다. 『노인과 바다』(1952)는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남긴 백조의 노래이다.
옛날엔 참 재미있으려고 앨범을 쳐다봤었는데. 어린 나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어서. 그것밖에 안보였는데. 앨범의 주인공은 나였는데. 오늘 오랜만에 펼쳐본 내 앨범에서는 어린 나보다도 지금 내 나이의 젊은 아빠랑 엄마 밖에 보이지가 않네. 어느새 앨범의 주인공이 엄마랑 아빠가 되어있네. 눈물이 계속 차올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제부터 캐럴을 듣기 시작했다. 미술학원에 갔는데, 선생님이 캐럴을 틀어놓으신 거다. 들으니 기분도 좋아지고 신나져서 나도 이제 캐럴을 틀어두기로 했다. 어젠 엄마가 캐럴에 맞춰 춤을 췄다.
어제와 오늘까지도 운동을 쉬었다. 오늘은 아홉시에 일어나서 토스트를 먹고, 엄마랑 아빠는 운동을 하러 나가고 나는 집에 남았다.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셨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를 봤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 새미는 네모난 프레임 속 세상을 바라본다. 어렸을 때 엄마아빠와 극장에 다녀온 뒤로 기차가 '부딪히는' 장면에 매료된 그는 엄마의 도움으로 그것을 촬영하게 된다. 그 이후로 촬영이라는 행위에 대해 매력을 느낀 새미. 그는 세계를 네모나게 바라본다. 그는 그것을 해야만 하는 사람처럼 그것에 푹 빠진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취미로 치부해 버리는 아버지, 그를 지지해 주던 어머니와의 문제로 그는 영화 만드는 것을 그만둔다. 그는 더이상 세상을 네모나게 바라보지 않게 된다. 그동안은 모든 것들을 look했다면, 이젠 see하게 된 거다. 바라보는 것과, 보는것은 다르다. 무언가 바라보게 될 때, 그것은 다른 큰 의미로 다시 나에게 온다. 그는 세상을 바라보던 것을 멈추고, 그저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우연히 영화를 다시 촬영할 기회가 생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촬영을 하게 된 새미. 그는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은 로건. 새미는 본인이 바라보는 그대로 로건을 영웅 삼아 영화를 제작했다. 그러나 영화를 본 로건은 새미를 찾아가 왜 본인을 허구의 영웅으로 그려놓았는지 화를 낸다. 여기에서 1차적으로 발생된 사실,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반영된 사건, 2차 제작물인 사건을 스토리텔링하여 제작된 창작물, 그리고 그 관객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이나 노래, 그림, 영화, 옷, 조각 등은 모두 주관이 담긴 2차 제작물인 것이다. 그렇게 다시금 영화에 대한 끈을 놓지 않은 주인공 새미는 신문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영화제작사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린다. 그리고, 결국 그는 영화제작을 시작한다.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주체의 의도가 반영된 아주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의도가 담긴 행동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을 잦각하고 있다는 것이 주요한 시사점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삶을 더 바라보고자 노력한다. 이 순간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제, 왜 하고 있는지, 이것은 나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한다. 어떤 감정이든 온전히 느끼고 싶어서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감정이 살아있을 떄 쓰는 글은 그 감정도 함께 글 속에 묶어둔다. 일기를 쓰는 이유고, 메모를 하는 이유이다. 내가 바라보지 않으면 누구도 봐주지 않을 것들에 대해서도. 그저 지나가는 낙엽일지라도, 가을의 정취를 한껏 담은 계절의 일부라는 것에 대해서. 사소한 것들과 감정을 나누다보면, 부자가 된 기분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오늘은 구름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관찰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띠는 것과 같다.
오늘은 창 밖으로 보이는 강의 윤슬이 뱀의 비늘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고, 소복이 쌓여있는 낙엽들이 아직도 가을을 보내주기 싫다는 듯 서걱서걱 소리를 냈다.
어쩌면 붙잡고 싶은 몇몇의 관계가 있다. 내가 잡아두고 싶은 것이 관계인 건지, 그와의 시간인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기억은 흐려진다. 사진은 순간을 단면적으로 기록하지만, 나는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을 찍던 마음과 생각과 느낌과 기분을 다시금 떠올린다. 스투키에는 물을 자주 주면 안 된다. 여름철엔 일주일에 한 번, 겨울철엔 이주에 한 번. 스투키는 따뜻한 햇살을 좋아한다. 초보자도 쉽게 키울 수 있는 아프리카 식물. 가끔은 잊고 있던 것들이 갑작스럽게 생각이 난다. 나를 들여다볼 시간이 많아질수록 더욱이 그렇다. 가까웠던 관계들이 하나 둘 뭉그러져 갈 때, 붙잡아 보고 싶은 마음 반/그 에너지를 나에게 쏟아버리고 싶은 마음 반. 나는 어쩌면 나를 위해 여럿의 손을 놓았다. 이런 나를. 사랑하는 몇몇이 있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라. 함께 산다는 건 언제나 어렵구나! 저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말과 글은 집을 구성하는 벽돌이요, 그를 이루는 시각적 프레임은 집의 구조다. 생각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마다 다른 대주제를 가진다. welcome! to my home
아빠는 요즘 스펜서 존슨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를 원서로 읽고 있다. 어제도 그가 엄마와 나에게 잠시 해 준 말이긴 하지만, 책에서 이런 내용이 나왔다며 인상이 깊었다고 했다. "변화를 두려워하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없어. 새로운 치즈를 찾으러 가려면, 변화를 맞이해야 해." 아빠는 오늘도 카페에서 그 구절을 인용하며 말했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 읽었어도 참 좋았던 책이지만, 지금 읽으니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 책을 썼는지에 대해서 알겠다고 했다. 아빠와 엄마는 학원을 한다. 아빠는 원래 현대건설에 다녔다. 회사생활 6년을 하고, 엄마와 함께 학원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그 학원이 약 25년이 다 된 것이다. 50살이 되면 은퇴를 해야겠노라고 둘은 결심을 했다. 50살이 되었을 땐, 55살엔 은퇴를 해야겠노라고 둘은 결심했다. 그게 바로 올 해이고, 둘은 일년의 유예기간을 더 두었다. 처음엔 은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나와 내 동생에 대한 지원을 위해 은퇴를 미루고 미루는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도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이겠지만, 오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땐, 다른 이유가 더 컸다. 그리고 그게 아빠가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를 읽으며 인상 깊게 읽어준 구절과 맞닿아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은퇴를 하게 되면, 원래 일을 하던 시간에 '무언가'를 더 해야 하는데, 그것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에 대한 빈칸과 혹시나 원치 않은 것들을 하게 될 수도 있는 미래의 나에 대한 걱정이 그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신선한 시각이었다. 깨달았다. 그래서 아빠가 내가 퇴사를 했을 때, 그렇게 신경을 많이 썼던 것이구나. 그도 계속 그 빈칸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나는 괜찮은지 계속 물어봤던 거구나. 나는 물론 그들은 너무나도 멋지게 빈칸을 채워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그런 걱정은 자식으로서 해 본 적이 없다. 누구보다도 더 다채롭게 채워나갈 것을 아는데, 왜 걱정하는 걸까. 그래도 사람은 항상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기에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막상 한 발 자국 들여놓는 순간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진다. 아빠는 덧붙였다. 나이가 들수록, 더 변화를 두려워하게 되고 생각이 많을 수록 주춤하게 되는 것 같다. 때로는 생각을 적게 하는 것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사실 기대와 같이 불안정성에서 온다. 안정적인 것에 대한 만족감이나 편안함을 느끼는 부류에서는 더더욱 그 불안정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다. 불안정성에 도전하는 것, 그들은 그것을 용기라고 부른다. 사실 나는 큰 생각이 없이, 내가 직관적으로 이것을 해야 할 것 같으면 그것에 대한 기회를 찾고 선택한다. 프랑스로 교환학생을 갈 때에도, 퇴사를 하고 워킹홀리데일르 앞두고 있는 지금에도.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것을 선택하지 않고도 후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느냐?" 만약 내 대답이 no라면, 그것에 대한 길을 찾고 진행하는 거다. 그렇지만 물론 조심성도 필요하다. 엄마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라고 항상 말한다. 나는 사실 용기 있는 사람이라기 보다 생각이 덜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쓸데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만히 두질 않는데, 내가 맞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느 생각이 없이 밀어 붙이는 경향이 있다. 아무튼 그런 대화가 시작된 것에는 올해 초에 각자 세웠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이다. 엄마가 어젯밤에 잠에 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올해 계획을 세운지가 얼마 안 된 것같은데, 벌써 내년 계획을 세워야 하다니. 뭘 계획으로 세울까.'' 올해 초인가 작년 말에 동생이랑 아빠랑 엄마랑 다 같이 모여서 저녁을 먹으며 각자 새해 계획 5가지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나는 책 12권 읽기, 코딩 배우기, 새로운 언어 배우기, 마라톤, 영상 툴 배우기 이렇게 다섯개였다. 기억이 안나서 아빠가 메모장에 적어둔 걸 말해줌ㅋㅋ 책을 생각보다 안 읽은 거다. 왜이렇게 책을 못읽었을까. 다시금 책을 열심히 읽어야 겠다. 요즘은 재즈의 계절을 읽고 있다.
새로운 숙소 1층에는 빈백과 스크린이 있고, 다락방 같은 공간은 책장으로 둘러 쌓여있고, 회전 계단을 타고 올라가 2층에는 방이 있고, 방에는 침대 두 개 사이에 조그마한 책상이 있다. 창문을 열면 창 밖이 보이고, 창 밖에는 캠핑체어들과 조그맣고 하얀 나무 협탁들이 있다. 체어들은 바깥 풍경을 향해 볼 수 있게 놓여 있고, 그곳에 앉아있다.
비가 내리고 있고, 클래식이 흐른다. 마음은 여유롭고, 생각은 비워진다. 내가 지금 앉아있는 이곳 위는 비를 막을 수 있는 가림막이 쳐져있는데, 나무 구조물이고 다섯 개의 기둥들 중 두 개의 기둥엔 담쟁이가 칭칭 감고 있다. 이런 여유를 마음대로 누리라고 하늘에서 이슬비라도 내려주는 듯하다. 몸에 힘을 빼고 잔뜩 쉬기에는 이런 날 만한 날이 없다. 잠옷바지에 티셔츠만 바꿔 입고 어그를 신고 캠핑체어에 앉아있는 지금, 여행을 온 것 같다. 여행지에 가면, 하나의 숙소에 진득하게 머문다. 마치 내가 그 숙소의 주인장인 양 주변 지리에 익숙해지고, 동네 산책을 즐긴다. 좋았던 카페는 두 번 이상 방문하고, 마음에 들었던 술집은 내가 이곳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이 되어 단골이 될 것인 양 군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참 여행에 온 것 같다.
비를 즐기는 건 정말 여유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특권 같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숙소 카페에서 웰컴 드링크를 마셨다. 마시면서 사장님 부부와 대화를 나누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과 익숙하지 않은 삶을 서로 공유하는 것은 언제나 신난다. 그들의 삶이 나의 흥미를 끌 경우엔 더더욱. 오늘은 여자사장님의 경험들이 나의 흥미를 돋우었다. 그 사람에 대한 벽이 한 겹 줄어들었다. 여자 사장님은 작가이시다. (나는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그는 과거 본인의 작업물을 누군가가 바라보기엔 쓰레기일 수 있다고 말했다. 과거의 작업물에 대해서 말하게 되었다. 일기를 적은 종이나 작가노트 들을 풀을 쒀서 무언가 만드셨다고 했다. 작품은 사람의 형태를 띤 관이었다. 그 작업물 하나에 내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작품 사진을 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아쉽게도 작품 사진은 남아있는 게 없고, 작품마저 불에 타버렸다. 이창동의 영화 <버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장님의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그의 작품이 영화 <버닝>에서 처럼그 당시 작업실로 사용하던 비닐하우스가 불타게 되면서 없어졌다는 점. 방화범이 비닐하우스에 불을 냈던 것이었고, 그의 여러 작품들은 다 불에 타서 없어졌다. 남은 것 하나는 작업을 하실 때 사용하시는 고철덩어리. 그의 작품 <관>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공중 공기중 공기가 되어. 여기도 저기도 아닌 이곳에서 그때나 그때의 내가 아닌 지금의 나로. 어디에도 속해 있지 못한다는 건 결국 어디에나 속한다는 거다. 공중에 있으면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내가 사랑을 했던 적이 있던가. 사랑은 결국 주고 받는 감정이다. 오늘은 주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결론 지으며, 사랑을 해본적이 없는 내가 된다. 매번 짓는 결론은 같기도, 다르기도 하다. 첫사랑이 누구냐고 물으면, 1번은 중학생 때 다닌 영어영재교육원에서 보았던 오빠이고, 2번은 20살에 그아이다. 아직까지는. 나는 과연 그들을 좋아했을까? 좋아했다. 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형태를 띠었다. 내적으로. 나를 움직이는. 나는 과연 그들을 사랑했을까? 모르겠다. 사랑이라는걸 해본적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오늘 같은 날엔 특히나 대답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한편으론 사랑은 들을수도 만질수도 느낄수도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엄마 몰래
라는 말로 먹먹해지는 목소리를 유쾌하게 변장시키며 지갑에있는 현금을 몰래 쥐어주는 아빠. 그런 아빠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덩달아 먹먹해지는.
그래도 그동안 잘 놓아주는 법을 알게 모르게 체득한 것 같다. 어렸을 적에는 잘 놓아주지 못했다. 붙잡은 손에서 그게 문드러 없어질 때까지 더 꽉 쥐었다. 여러번의 이별과 작별을 하면서 잘 헤어지는 법을 배운 것 같다. 노래를 더 크게 듣고 눈을 깜빡이지 않고 자세히 보며 숨이 다 찰 때까지 냄새를 들이 마시는 것. 한동안 멍하니 머무는 것.
아빠가 퇴근하는 길에 미리벌초등학교 신호 기다리며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지내고 있냐고. 요즘 어떠냐고. 일주일은 좀 적응하다가 이젠 늦잠자고 달리기도 하고 친구들도 만난다고 했다. 엄마도 아빠도 말은 안해도 나를 아주 신경쓰고 있는 듯해. 퇴사 이후의 나에 대해서. 아빠가 즐기라고 했다. 즐기려고 하고 있다. 어쩌면 내가 그렸던 삶일지도 모르니.
유연언니랑 평소와 다름없이 헤어지다가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다가가서 언니를 안았다. 언니가 고생했다고 했다. 고생했다며 내 등을 쓰다듬어주는 언니를 보고는 그리고 그 눈에 맺힌 눈물을 보고는 나도 눈물이 났다. 고생했다는 말 한 마디가. 나의 삼년을 위로해 주는 듯 했다. 언니랑 같이 지하철로 퇴근 하던 시절도 생각 나고. 항상 같이 먹던 점심도 생각 나고. 언니덕에 시작한 러닝도 생각 나고. 오늘 평소와 다름없이 먹었던 점심도. 냄지화에서의 양치도. 너무 평소와 다름 없어서 감사히도 눈물이 났다.
건강하게 나이들어라 하고 싶은 거하고. 겨울아이 기타치며 불러주는, 아빠
돈 벌어먹고 산다고 생각하지말고 인생을 산다고 생각해 그동안 고생많았다~
사진을 찍는 건 어쩌면 용기다. 걸음을 멈춰서서 사각형의 앵글 속으로 상을 담는 것. 인물을 담는 것. 사물을 담는 것. 자연을 담는 것. 사물을 담는 것. 특히나 인물을 담을 땐 더더욱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우다다 앞으로 뛰어가서 아빠엄마가 나에게 오는 모습을 찍으려니 아빠가 이렇게 말했다. “뛰지마 우리가 천천히 걸어갈게~”
아췸에엄마가보내준 떡먹었는데 밀양가고싶더고 생각했다. 🥲🥲🥲🥲😂😂😂😂🥲🥲🥲오늘은 요가를 가야겠다.
내가 회상할 수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처음으로 내가 별을 보았을 때이다. 별쪽에서는 오래전부터 가끔 나를 본 일이 있었겠지만. 어느 날 밤, 나는 어머니 무릎에 안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추운 것 같았다. 나는 몸시 떨리고 마치 몸이 얼어붙는 것처럼 추웠다. 어쩌면 공포심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나의 작은 자아라는 것이 자신에 대하여 여느 때보다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때 어머니는 나에게 빛나는 별을 가리켜 보였다. 나는 신비스럽게 느끼며, 아마도 어머니가 저렇게 별들을 곱게 만들어 놓으셨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다시금 따뜻하게 느껴지면서 나는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언젠가 내가 풀밭에 누워 있을 때였다. 내 주위의 만물이 고개를 까딱거리기도 하고, 윙윙거리기도 하고, 휙휙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발이 많고 날개가 있는 조그만 생물이 큰 떼를 지어 날아와서 나의 이마와 눈에 앉아 안녕하세요, 하고 말했다. 하지만 몹시 눈이 아팠으므로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는, “아이구 가엾어라, 이렇게 모기한테 물리다니” 하고 말했다. 나는 눈을 뜰수도 없고 푸른 하늘을 쳐다볼 수 도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그때 갓따온 제비꽃 다발을 안고 계셨는데, 그 보랏빛 속에 녹아든 향그러운 내음이 머리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지금도 난 봄이 되어 처음 피어난 제비꽃을 보면,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가만히 눈을 감고 그때의 보랏빛 하늘을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을 수 없는 기분이 든다.
우리할머니는 이름에 꽃부리 영과 사내 남을 쓴다. 꽃부리 영자는 보통 이름 자에 안 쓴다고들 하지만, 영웅의 ‘영’ 자와 같은 한문이다. 창원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니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엄마가 아가였을 때부터 영웅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할아버지가 공부하겠다는 엄마를 말리려고 책가방을 산에 갖다 버려도, 여자도 똑똑해야 한다며 엄마를 공부시키고 대학까지 보냈다. 엄마가 아가일 땐, 엄마를 어부바하고 외삼촌들과 이모를 데리고 창원에서 서울까지 올라가 떼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때 서울에 땅을 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지 한 번씩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하고. 내가 아가일 땐, 한글과 영어를 배우겠다고 해서 내가 할머니 한글판과 알파벳판을 만들어줬다. 내가 중등학생일 땐, 할머니는 여성회관 개나리반에서 한글을 배우고 글을 썼다. 아직도 할머니는 이동보조기구 안에 3-1 국어책을 넣어 다닌다. 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시장에서 생닭을 팔았다. 치킨이 먹고 싶다고 하면 직접 닭을 튀겨 치킨을 만들어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청바지를 엄마가 입혔을 때엔 새로운 청바지를 사러 가자며 내 손을 잡고 이마트로 갔다. 할머니는 걷는 걸 너무나도 좋아해서 항상 걸어야 했고, 항상 내가 초등학생 때 들고 다니던 빨간색 작은 휴대용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다. 할머니는 어느새 어렸을 적 동화책에 나오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다.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해서 많이 아프다고 하는데, 할머니가 아프지 않고 건강히 계셨으면 좋겠다. 할머니는 나의 엄마의 엄마이기도 하니까. 작년엔 아파서 죽고 싶다던 할머니가 올해엔 젊어지고 싶다고 했다. 매번 집 밖으로 나와 차가 없어질 때까지 서서 배웅해 주던 할머니가 작년엔 허리가 너무 아파서 누워서 아쉬워 내 손을 놓지 못했고, 배웅도 못해주었는데. 올해엔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 차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굽은 허리 꼿꼿이 세워가며 배웅해 주었다.
소설가 막스 뮐러(Max Müller)가 ‘독일인의 사랑’에서 ‘시작이라는 것이 차라리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시작을 떠올리려고 하면 금세 모든 생각과 기억이 멈춰버리니 말이다’라 한 바가 퍽 이해가 된다.
지하철타면서 최근에 알게 된 뷔의 스노우플라워를 들었는데, 귀신같이 지하철에서 내리니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내리니까 엄마한테 전화했다. 눈내려서 너무 예쁘다고. 딱 그때 어제 엄마가 흩날리는 낙엽이 너무 예쁘다고 나한테 전화했던게 기억이 났다. 무언가 예쁜 걸 봤을 때 공유하고 싶은 마음. 그때 엄마전화를 못받은게 못내 아쉽다. 내가 받았으면 엄마는 지금 내가 느낀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텐데. 누군가와 행복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건 좋은 것 같아. 더 행복해져.
피아노 치는 남자. 한 곡이 끝나자 뒤에서 박수를 건네는 블론드 헤어의 남자. 피아노 치는 남자에게 여기에 사는지 묻는다. 피아노 치는 남자는 파리에 살고 공부 중이며 영어를 쓰고 본인이 작업 중인 곡을 쳤다. 블론드 헤어의 남자. 피아노 친 남자와 대화한다. 옆에서 감상 중이던 할아버지. 그들의 대화에 참여한다. 그러고는 다 같이 대화한다. 영어로. 피아노 치는 남자. 블론드 헤어의 남자에게 피아노를 권한다. 블론드 헤어의 남자, 사람들이 너의 연주 좋아한다고 거절한다. 옆에서 앉아 책을 읽던 남자. 쇼팽의 곡을 권한다. 피아노 치던 남자. 그곡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묻자. 책 읽던 남자. c minor라고 답하고. 피아노 치는 남자는 쇼팽의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책읽던 남자의 옆에 앉은 여자. 드뷔시의 곡을 연주할 줄 아느냐 묻는다. 피아노 치는 남자. 이내 드뷔시의 곡을 연주한다. 블론드 헤어의 남자. 앉아 있는 그 커플에게 둘도 피아노를 쳤는지 묻는다. 여자. 남자. 조금 쳤다고 대답한다. 피아노 치는 남자. 짐을 싼다. 이제 자기는 가야 할 때라고 한다. 앉아있는 여자.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다. 피아노 치는 남자. States. 남자와 여자. 그중 어디냐 묻는다. one of them이라 대답하다가 결국엔 휴스턴에서 왔다고 한다.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떠나는 남자. 잠시 정적. 그리고 서로 어디에서 왔는지 대화를 나눈다. 옆에 앉아있던 여자. 피아노로 가서 앉는다. 책을 읽던 남자. 여자가 연주하는 피아노 옆 바닥으로 가 앉는다.
다짐과 소원은 유치해 보이지만 가지고 사는 게 좋은 것 같아. 달리기 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 다들 일은 언제하고 달리기는 언제하는거지? 빠리는 더 시끄러워 진 것 같아.
부슬부슬 비내리는데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자전거를 탔다. 대게 자전거를 열심히 타는 성향인 나는, 오늘은 조금 천천히 즐기고 싶었음. 대로에는 사람도 차도 많기 때문에 골목길 탐방을 테마로 잡았다. 그러다가 신호등이 초록불이 되면 그쪽으로 가보는거지. 그렇게 뱅글뱅글 돌면서 알게 된 점은. 귀여운 색조합의 건물들이 참 많다는 것. 왜이렇게 귀여운 색조합의 건뮬들이 많지? 그리고 글쓰러 가보고싶은 카페 하나를 발견했다. 지도에도 찍어뒀지! 다음번에 가봐야지. 딱 한 시간 돌고 돌아와서 집에 가려는데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카페를 발견했다. 영업 중인 걸 보고는 그냥 바로 들어와버림.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갈 생각으로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이제 거의 다 마셨다. 이 카페를 자주 오게 될 것 같은 느낌에 큐폰까지 챙겨받음. 가만히 앉아서 사진들 정리도 좀 하고 노래도 듣는데, 여기 직원분들 말도 엿들었다. 배우고 싶다는 욕망?을 직장에서 가지는 건 솔직히 욕심인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린듯. 결국 이 직원분은 그래도 배움을 좇아 이 카페로 오셨다. 같이 이야기 나누던 분은 먼저 여기서 일하면서 사장님과의 관계가 어느정도 형성된 분인 것 같음. 두 분 다 너무 이 업계에 꿈과 욕심과 열정이 넘치는 것 같은 대화를 엿들으니 재미가 있었음. 뭔가 일하는 두 사람이 하는 대화가 저런 주제라는게 부럽기도? 멋지기도? 건강하기도 했달까. 여기 그리고 분뤼기도 좋다. 담에 아침에 노트북들고와야지!
글고 오늘 자전거 타는데 매미가 엄청 우렁차게 울어서 정말 여름임이 한껏 실감났다. 한여름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 한려름같은 지금. 그 물먹은 초록색의 나무들 사이로 매미소리 들으며 자전거타는데 와~진짜 여름이구나. our own summer 들으면서 집가야지! 먼가 기분이! 개운하고 좋다. 낼도 파이팅
집에 도착해서 엄마가 보내준 반찬들을 뜯어보다가, 편지가 들어있는 걸 발견했다. 씻고 편하게 읽고 싶은 마음에 정리하던 걸 멈추고 바로 씻고 나왔다. 씻으면서 어떤 내용일까 생각하면서 빠르게느리게 씻었다. 혹시나 안좋은 내용들은 아니겠지? 생각하면서 씻고 나와서 편지 봉투를 들고 침대 위에 앉았다. 봉투 위의 글씨를 가만히 읽는데, 이건 아빠의 글씨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때부터 눈물이 눈물이. 아빠네! 테이프로 얼마나 꼼꼼히 붙여놨던지 손톱으로 잘 뜯지도 못하면서 눈물이 계속 주르륵 주르륵. 뜯어 읽는데 몇 번이고 쓰다 말다 했을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서 또 눈물이 흘렀다. 내가 최근 가지고 있던 고민들에 대한 둥글둥글하지만 뾰족한 해답들이 편지 속에 들어있었다. 이번에 밀양에 내려가면 물어보고 싶던 것들이? 이미 편지에 많이 적혀 있었다. 참 신기했다. 아빠와 나는 무슨 칩이나 소프트웨어를 같이 공유하고 있는 걸까? 마지막엔 아빠와 내가 서로 같이 아는 일상의 순간 한 조각까지 공유하면서 그때 아빠도 좋았다고. 서로 아는 순간을 공유하면서 감정을 말하는 것은 나를 울린다. 아빠는 나 못지 않은 감성쟁이다. 아빠에게 내가 그 성질을 물려 받았을지도. 버스에서 아빠 편지에 대해서 곱씹어 생각하는데 또 눈물이 났다. 우리아빠 참 나랑 닮은 사람인데. 우리아빠의 지금 꿈은 영화배우다. 삶은 영화이고 자신은 그 속의 배우라고 했다. 우리아빠는 대학 시절에 합창부와 문예동아리에 속해 있었다. 그런 아빠가 지금의 아빠가 되기 위한 여러 점들 속에서 나랑 비슷한 고민들을, 또는 나보다 더한 고민들을 거쳐 지나갔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더 눈물이 났다. 어쩌면 원하는 것들을 누르고 눌렀던 그 마음이 지금의 나에게 현명하고 지혜로운 말들을 할 수 있게끔 아빠를 만들어 왔을까. 내가 좇고 싶은 삶이 있듯 아빠도 좇고 싶은 삶이 있었을텐데. 뭔가 나에게는 너가 원하는 삶을 원없이 좇으라 하는 것만 같았다.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며 괴로움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가혹한 교훈을 열네살 난 토니오의 영혼은 이미 인생에서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경험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말하자면 마음 속에 단단히 기록해 두어 거기에서 어느 정도 즐거움까지 느끼는 소유자였다.
최고의 글은 분명 사랑에 빠져있을 때 나옵니다. 그게 다 똑같아 보인다면, 차라리 아무 설명도 안하렵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의 말:은둔시절의 마지막 인터뷰 중
너는 비둘기를 사랑하고
초롱꽃을 사랑하고
너는 애기를 사랑하고
또 시냇물 소리와 산들바람과
흰 구름까지를 사랑한다
그러한 너를 내가 사랑하므로
나는 저절로
비둘기를 사랑하고
초롱꽃, 애기, 시넷물 소리
산들바람, 흰 구름까지를 또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권태는 혐오이지만 증오는 아닌, 가까움이지만 사랑은 아닌, 행위이지만 열정은 아닌, 중간에 머무르는 감정이자 태도다. 권태는 감정이 촉발한 행동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 불구의 삶 사랑의 말 어른이 되고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양효실
이동진은 아래의 질문이 이렇게 답했다.
영화감상이 책 읽는 것만큼이나 교양과 지식을 쌓는데 도움이 될까요?
영화는 말하자면 술 같은 거고요
책은 물 같은 거예요
책은 우리를 좋은 의미에서 차갑게 만들고
영화는 좋은 의미에서 우리를 뜨겁게 만드는데요
근데 이성은 기본적으로 차가운 겁니다
교양에 관한한 영화는 책을 영원히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삶을 살아내는 데에는, 차가움 못지 않게 뜨거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아주 문득 크게 깨닫는다.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차가움이 필요하다. 다만, 사회는 모여 사는 곳이기에 결코 혼자 살아낼 수 없다. 내가 결국엔 항상 뜨거워지기를 선택하는 이유.
주체가 잃은 꿈을 연이어 꾼다. 마치 나의 글을 너에게 빼앗긴 듯 조급하다
예를들면 미음 마음 만남 냠냠…
사랑은 먼저 내려가고 그 다음에 올라가는 길이다. 환상이 환멸이 되는 길을, 올라가려다 추락하는 길을 거꾸로 밟아가는 중에 사랑은 기이한 긍정의 방법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사랑은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서 함께 밝은 곳을 찾거나 더 어두운 곳으로 함께 내려가는 용기다. 그러니 누군가가 어둡고 축축하고 더럽고 악취 뿐인 세상에 있는 게 마음이 쓰인다면, 그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먼저 그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때 당신은 당신의 것을 잃거나 그들과 나눠야 한다. 아니면 그들의 것을 당신이 좀 얻거나. 그래야 당신이 올라올 때 그들도 함께 올라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기적을 사랑하고 숭배하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그렇게 와 있다. 나는 그것이 오는 것을 보지도, 씨앗의 껍질이 벗겨지는 것도, 여린 즙이 빛을 받아 처음으로 바르르 떠는 것도 보지 못했다. 어느새 사방에는 꽃들이 피어 있고 나무들은 빛나는 잎들과 거품처럼 하얀 꽃들로 반짝이고, 새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따사로운 푸르름 속으로 아름다운 아치를 그리며 날아오른다. 내가 그것을 보았건 못 보았건 기적은 이루어졌다. - 죽은 나무를 위한 애도, 헤르만 헤세
사람이 평범하게 태어나, 평화롭게 살다, 평온하게 죽을 수 없다는 걸,
그게 당연하다는 걸 아는데,
저는 그게 가장 두렵고,
두렵지만, 두려워도,
삶의 실상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삶의 반대는 평인 것인가,
그래서 나는 평하지 못한 삶의 두려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현실 속 수많은 불평한 삶들은 이야기가 되고,
삶에 대한 두려움과 삶으로 인한 고통들은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일까,
모든 생명은 각자 의미심장하게 굴곡지고,
그 유일무이한 무늬가 우리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일까,
삶이 결코 평범하지도, 평화롭지도, 평온할 수도 없다는 사실은,
늘 당연하면서도 놀랍고,
이상하면서 또 궁금하고,
두려우면서 매혹적이어서,
우리는 자꾸 삶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평범하게 태어나, 평화롭게 살다, 평온하게 죽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그 불가능한 생을 생각하면,
그러나 그 불가능함과는 별개로,
모든 사람과 모든 생명이
평범하고 평화롭고 평온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부디 단 한번만이라도
이 세상에서 어떤 생명 하나가,
그게 날파리 한 마리라 하더라도,
평범하게 태어나, 평화롭게 살다, 평온하게 죽은 적이 있기를,
단 한번만이라도
한번만은 그 불가능한 삶이 존재했기를
기도하게 되는 이 마음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불가능한 갈망 때문에,
이 갈망이 거대한 화폭의 틀처럼
평하지 못한 삶의 다채로운 풍경들을 단단히 잡아주고 팽팽히 당겨주기 때문에,
낱낱의 삶, 낱낱의 이야기들은 모래처럼 덧없이 흩어지지 않고 살아남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삶이 평하기를,
덜 아프기를, 조금 더 견딜만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당신의 평하지 못한 삶의 복판에,
아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삶 한 가운데,
곱고 단단하게 심어 놓으면 어떨까,
그러면 그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한그루 이야기가 될까,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당신을 상상합니다.
사랑보다 어려운,
결과보다도 과정이 중요한 행위?는 단연코 춤이구나. 춤. 춤. 춤. 춤을 추자. 한 장의 사진 같은 결과물은 연속적인 몸의 움직임인 춤을 결코 흉내낼 수 없음이다.
결혼하고 싶다면 이렇게 자문하라.“나는 이 사람과 늙어서도 대화를 즐길 수 있는가?”/프리드리히 니체
있잖아,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이 너나 나,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 이 세상에 마술이란게 있다면 그건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 나누려는 시도 안에 존재할 거야
네가 아까 커플이 몇 년 동안 같이 살게 되면 상대의 반응을 예측할 수 있고 또 상대의 습관에 실증을 느끼게 돼 서로를 싫어하게 된다고 했잖아 난 정반대일 것 같아 난 상대에 대해 완전히 알게 될 때 정말 사랑에 빠질 것 같거든
가르마를 어떻게 타는지 이런 날은 어떤 셔츠를 입는지 이런 상황에선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할지 알게 되면 난 그때야 비로소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거야/영화 비포선라이즈
마법이나 신비를 믿지 않으면 죽은 것과 같다/아인슈타인